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문단 편집) === 소장파 의원 시절 === 그가 막 초선의원에 당선됐을 시절, 자유당의 지도자이자 영국의 수상이었던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자 백방 노력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로이드 조지 역시 부모의 모국인 웨일스의 자치 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아일랜드 자치권 법안이 영국 하원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부결되면서 글래드스턴 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웨일스 자치 운동 역시 시들해졌고, 결정적으로 1895년 영국 총선에서 자유당의 참패 원인으로 지방 자치 운동이 거론되면서 로이드 조지는 웨일스 자치 운동을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참고로 그가 꿈꿨던 웨일스 자치는 [[토니 블레어]] 집권 초기인 1997년에 주민 투표로 가결되면서 1998년에야 자치의회가 설치되면서 시작된다.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 자치도 시작되고 1970년대에 정지됐던 [[북아일랜드]] 자치가 부활했다.] 하지만 이 시련은 그에게 [[추진력을 얻기 위함|추진력을 주기 위함]]이었고 1902년 [[보어 전쟁]]과 [[제국주의]]의 비도덕성을 비판[* 다만 추후 총리 시절 1차대전 와중에는 인도의 독립을 약속했다가 종전 이후 입을 싹 씻는 모습에서 보이듯이 그 역시 엄연한 제국주의자였다. 뭐 그나마 온건한 성향의 제국주의자이기는 했지만...]하는 연설을 행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정치인이 된다. 이 연설에 분노한 전쟁 지지자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기도 하고, 전쟁 수행 지지 여부를 놓고 자유당이 분열되는 등 시련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용감한 연설 덕분에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내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연이어서 교회학교에 국가가 보조금을 제공하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 글래드스턴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영국 자유당의 핵심 정체성 중 하나는 바로 [[정교분리]]였다.]하면서 자타공인 자유당 내 거물이 된 로이드 조지는 1905년 [[헨리 캠벨배너먼]]을 수상으로 하는 자유당 정권이 수립되면서 상무원(商務院) 장관으로 등용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